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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My Country

요즘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에 대한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혹일 뿐, 아직까지 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난 바는 전혀 없다. (상세한 내용은 여러 기사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얘기하고 싶다.) 난 법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이후로도 직접적인 위법 행위가 밝혀질 리는 없다고 확신한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설사 뭔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법을 어기면서 까지 무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최대한 법망을 피하되, 도저히 피할 수 없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얻는 것 보다 잃을 것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 즉, 조국이라는 사람이 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일반적인 상식과 법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지하철에서 마침 빈 자리를 발견하여 편하게 앉아있는데, 나이 많은 할머니가 그 앞에 서 계시다고 생각해보자. 법적으로는 양보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 자리는 먼저 앉은 사람의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다. 특히나 그 사람이 평소에 노인 공경의 중요성을 주장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비난 받을 수 밖에 없다. 지금 조국 후보자의 모습이 정확히 이와 같다. 조국 후보자는 이후의 청문회를 통해 본인이 "범법자"가 아니라는 점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위선자"라는 점은 숨길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법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니까.
최근 글

양심적 병역거부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최근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나,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처럼 단순하고 쉬운 문제가 왜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다. 일단,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주장은 “힘든 군생활을 회피하기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훈련을 받는 것은 나의 종교적/개인적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국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렇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전과자가 됐다. 사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이해가 간다. 사람마다 종교적/개인적 신념이 다를 수 있는데, 그러한 신념으로 인해 교도소 까지 가야 한다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병역을 거부했으니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전과자로 만드는 건 좀 심하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를 수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군대에 가기 싫어서 고의로 허리 디스크를 유발하고, 스스로 살을 찌워 고도비만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손가락까지 자르는 세상이다. (그 정도로 우리나라 군대가 열악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수용하면, 단순 병역기피자들이 스스로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주장할 것이 자명하다. 이는 독심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밝혀낼 방법이 없다. (물론, 그 동안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군대에 가기 싫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신념에 동의하진 않지만, 어쨌든 그 신념을 위해 전과자가 되는 것까지 감수할 정도라면, 그 신념은 진심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치 어려운 문제인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체 복무제도를 만들되, 군생활 보다 더 긴 기간 동안 더 힘든 일을 하도록 하면 된다. 앞서 말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군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거부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가 쓴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을 드디어 다 읽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히스클리프의 처절하고 비극적인 사랑과 복수는, 제목 그대로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 방식은 매우 유머러스하다는 점이다. 이는 작중 “명목상의 화자”인 록우드와 “실질적인 화자”인 엘렌 딘의 말투 때문인데, 상당히 이질적이고 역설적인 느낌을 준다.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 워낙 유명하고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이기 때문에, 굳이 뛰어난 점을 논하기 보다는 아쉬웠던 점을 위주로 얘기해보고 싶다. 먼저, 전반적인 내용 전개 중 가장 허술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가출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경위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힌들리 언쇼가 히스클리프에게 대저택과 모든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도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 규모의 담보를 제공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매우 큰 돈을 빌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스클리프가 그런 엄청난 재산을 어떻게 모았을까? 우리 현실을 생각해보면, 든든한 배경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고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초 영국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폭풍의 언덕>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내에서 큰 의미가 없는 내용이라면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생략할 수 있다. 문제는, 히스클리프의 재산은 이후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이처럼 중요하다면, 당연히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개츠비의 막대한 재산은 소설 내에서 매우

언어와 문자

많은 사람들이 "언어"와 "문자"의 개념을 혼동한다. 그래서 한국어를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1) 아이 엠 어 보이. 2) NANEUN SONYEONIDA. 1번은 분명 한글로 적었지만, 한국어가 아니다. 영어라는 "언어"를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현했을 뿐이다. 2번은 그 반대다. 알파벳을 사용했지만, 본질적으로 한국어 문장을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와 문자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세종대왕이 만든 것은 한글이라는 "문자"일 뿐, 한국어라는 "언어"는 훨씬 오래 전부터 한민족이 사용해왔다. 한국어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언어를 적을 문자가 없어서 오랫동안 한자를 사용하다가, 세종대왕 이후로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자가 생겨난 것뿐이다. 매우 단순한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듯 하여 몇 자 적어본다.

배려와 견제

예전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수준(도저히 적절한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 이렇게 표현했다. 문화 수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시민 의식이라고 말해도 얼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사회 전반적인 의식 수준에 대해 말하고 싶다.)이 많이 향상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은, 소위 말하는 "후진국"들에 비하면, 분명 잘 정돈되고 질서가 잡힌 모습이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에 비하면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선진국 시민들은 "내가 남에게 방해가 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한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남이 나에게 방해가 되거나 피해를 주는 일"을 용납하지 못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처럼 정 반대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결과물은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이다. 즉, 선진국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인해 질서가 잡히지만, 한국에서는 서로에 대한 견제와 그로 인한 균형을 통해 질서가 잡히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운전을 할 때, 여타 선진국에서는 "저 차 운전자도 나름 바쁜 일이 있을 텐데, 비교적 시간이 많은 내가 양보를 해야겠구나"라는 느낌이라면, 우리 나라는 "맘 같아서는 다 제끼고 내가 먼저 가고 싶지만, 어차피 저 차 운전자도 똑같은 생각일 테고, 서로 먼저 가려다가 사고라도 나면 골치 아프니 속 편하게 양보를 해야겠구나" 정도의 느낌이랄까... 결과적으로, 서로 양보를 하고 질서가 지켜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한국의 경우 한가지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의 균형과 질서는 "배려"가 아니라 "견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상대방을 충분히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균형과 질서가 쉽게 깨져버리고 서로 추한 모습을 노출시키게 된다. (흔히 발생하는 "갑질" 사건들이

#MeToo?

  최근 #MeToo 운동이 화제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가해자의 범죄를 고발하고, 그 가해자가 비난 또는 처벌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 아직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시절에는,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흔히 있었다. 이제 피해자가 당당히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 전체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을 보면 우려스러운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MeToo 운동은 기본적으로 가해자를 사법기관에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여론에 대한 폭로와 호소일 뿐이다. 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법적인 조사 절차 없이 공개적인 폭로만을 통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구조다. 자기방어의 여지 따위는 없다. 물론, 매장당해 마땅한 나쁜놈들도 정말 많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무고 당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다수의 나쁜놈들을 벌하기 위해 소수의 억울한 사람을 모른 척 해도 되는 걸까? 또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일방적인 주장에 대해 검증할 방법이 없다. 설사 물리적인 강제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피해 여성이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응했다면 이는 분명 성폭력이다. 그러나,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응한 경우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 일이 발생한 직후에는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시류에 편승하여 폭로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의심스럽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여성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당연히 이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를 명확히 구분할 방법이 있을까?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성을 이용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상대 남성을

정치인의 공과 과

여러 유명 정치인 ( 특히 과거의 정치인 ) 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 그들 또한 정치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기 때문이다 .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 공 " 이 있는 반면에 , 독재와 탄압 (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고문과 살인 ) 이라는 " 과 " 가 있다 .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 그의 업적이 그의 과오를 덮고도 남는다고 주장한다 .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반대 주장을 한다 . 그런데 ,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 " 공 " 과 " 과 " 는 서로 상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예를 들어보자 . A 라는 사람이 선행을 베풀어 누군가의 목숨을 구했는데 , 동일 인물 A 가 시간이 흐른 후에 살인을 저질러 또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해보자 . 앞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으니 , 한 명쯤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 반대로 , 한 사람을 죽였으니 앞서 베풀었던 선행은 없어져 버리는 것일까 ? 아니다 . 선행은 선행이고 죄는 죄다 . 선행과 악행이 서로 상쇄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 다시 박정희로 돌아오면 , 그의 업적과 죄악은 공존한다 . " 공이 더 크니 전체적으로 봐서 좋은 사람이다 " 또는 " 과가 더 크니 전체적으로 나쁜 사람이다 " 따위의 판단은 맞지 않다 . 박정희를 예로 들었으나 ,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인을 무조건 이분법적으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덮어버릴 수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간과하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