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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한국식 나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 한국은 독특한 나이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 만 나이 " 를 사용하고 , 한국에서조차 공식 문서 등에는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지만 ,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나이는 항상 그보다 1~2 살 가량 많게 계산한다 . ( 생일이 지났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 즉 , 한국의 나이는 " 올해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몇 번째 맞는 해인가 ?" 를 의미하고 (12 월 31 일에 태어난 아기는, 태어난 바로 다음날 2 살이 된다 !), 다른 나라에서는 " 그 사람이 태어난 지 몇 년이 되었는가 ?" 를 의미하는 것이다 . 내가 알기로 , 세계에서 이런 나이 계산 방식을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 물론 , 내가 전문적인 조사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 한국과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는 나라가 또 있을 수도 있겠으나 , 이러한 방식을 쓰는 나라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그러면 , 왜 우리만 이런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인데 , 이는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 탓이 아닌가 한다 . 요즘 들어 그런 경향이 많이 줄어든 것은 맞지만 , 여전히 한국 문화에서는 위계질서가 매우 중요하다 . ( 심지어 한국어에서는 그러한 위계질서에 따라 사용하는 말까지 달라진다 .) 그리고 그 위계질서를 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바로 나이다 . 물론 , 회사에서는 직급이 중요하고 , 군대에서는 계급이 중요하고 , 거래 관계에서는 누가 " 갑 " 인지가 중요하다 . 그러나 , 그런 2 차적인 조건이 없을 경우 ( 쉽게 말해 , 업무적 / 개인적으로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경우 )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은 결국 나이가 될 수 밖에 없다 . 그런데 , 만약 " 만 나이 " 를 사용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 &

보복운전

  얼마 전 버스 기사와의 사소한 시비로 인해, (좀 거창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일단,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내가 운전 중이었고, 한 버스가 매우 위험하게 끼어들었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차들이 없었기 때문에, 급히 차선을 바꿔 피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화가 났고 매우 길게 경적을 울렸다. 버스도 이에 질세라 같이 경적을 울렸다. 사실, 거기까지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화가 났다. 잘못을 저지른 쪽이 오히려 경적을 울려대니, 화가 많이 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버스 앞에 잠깐 차를 세워서 버스의 주행을 방해했다. 부끄럽지만 전형적인 보복운전을 한 것이다. (단, 정말 솔직히 말하는데, 위험을 느낄 정도의 급정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앞쪽 신호등에 정차를 하게 됐는데, 역시 함께 정차한 버스 기사가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서로 (욕설까지는 아니지만)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했고, 신호가 바뀌자 버스 기사는 가버렸다. 그런데, 당시 버스 기사의 표정이 약간 신경 쓰였다. 뭔가 "두고 보자"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훨씬 젊은 내가 반말로 소리를 쳤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복운전은 단순 법규 위반과는 달리 형사처벌이 가능한 범죄다. 그리고 버스에는 당연히 블랙박스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버스 기사가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지우고, 내 보복운전 부분만 편집하여 경찰에 신고한다면,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조금만 참을걸 괜한 짓을 했구나... 등등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일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도는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크게 화를 내고 경적을 울리고 보복운전을 한 것이, 단순히 버스 기사의 위험한 끼어들기 때문이었을까?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사

<젋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위대한 개츠비>에 이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 읽었다. 단순히 연이어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소설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비교를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단, 공통점은 이렇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유부녀(개츠비 - 데이지 / 베르테르 - 로테)를 사랑하고, 그 유부녀는 안정적인 현실(개츠비 - 톰 뷰캐넌 / 베르테르 - 알베르트)과 주인공의 사랑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보이며,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통 받던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면서(개츠비 - 타살 / 베르테르 - 자살) 소설이 마무리된다. 또한, 그러한 과정을 제 3자의 눈(개츠비 - 닉 캐러웨이 / 베르테르 - 빌헬름)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당연히 세부적인 내용은 매우 다르지만, 이정도 공통점은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전혀 근거 없이 추측을 해보자면,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가 활동하던 시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미 매우 유명한 소설이었고, F. 스콧 피츠제럴드 정도 되는 작가가 그런 유명한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을 리 없으니, 아마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물론, 두 소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존재한다. 개츠비의 인생을 보면 (실패한 사랑을 제외하고) 도저히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맨손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고, 그 부를 바탕으로 사랑을 되찾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그 화려한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빈틈이 없었다. 물론, 나중에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건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불완전함일 뿐이다. 그 불완전함을 고려해도, 여전히 보통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초인이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다르다. 베르테르는 보통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어도, 그저 바라보고 주위를 맴도는 것 외에 그 어떤 적극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