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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불명



최근 충치 치료를 했다. 치료를 받은 직후에는 이가 시리고 욱신거려서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불현듯, 내가 "이가 시리다" 또는 "욱신거리다" 라고 표현하는 그 느낌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느낌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용하는 ""을 표현하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맛은 비교적 명확히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부모가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그 사탕의 맛을 표현할 때는 "달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가르칠 수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사탕의 맛은 먹는 사람 누구에게나 비교적 일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부모가 "달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맛은 아이가 배워서 알게 되는 "달다"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맛과 동일하다.

그런데, 다양한 종류의 통증을 표현하는 단어는 상황이 좀 다르다. 물론 단순히 "아프다"라는 단어는 쉽게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가 시리다", "욱신거리다"와 같은 단어들뿐만 아니라 "뻐근하다", "쓰라리다" 등등 복잡미묘한 통증을 표현하는 단어는 아이에게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인위적으로 아이가 느끼도록 할 방법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느낌을 아이에게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욱신거리다"라는 단어를 설명한다고 상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결국, 내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욱신거리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걸 듣는 다른 사람들이 연상하는 느낌은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경험을 통해 배운 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어떻게 그런 단어들을 배웠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추측컨대, 이와 같은 단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동일한 단어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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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신문 또는 인터넷 기사에서 흡연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언급한 기사들을 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참고로, 나는 비흡연자다.) 대부분의 기사는 이런 식이다: "흡연이 폐암 발생 위험을 X배 증가시키는 것으로 밝혀져..." 특이한 점은, 폐암 발생 위험이 몇 배 증가한다는 언급만 할 뿐, 실제로 몇%에서 몇%로 증가하는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는 기사는 거의 없다. (사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세상의 모든 기사를 전부 확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의" 없다고 표현하겠다.) 왜 그럴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흡연자든 비흡연자든 폐암 발생 가능성(%)이 너무 낮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를 들어, 비흡연자의 폐암 발생 위험이 0.1%라고 하자. (당연히 임의로 예를 든 것이다. 실제 수치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흡연이 폐암 발생 위험을 10배 높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봤자, 흡연자의 폐암 발생 위험은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흡연을 하면 폐암 발생 위험이 10배로 높아져서 1%가 된다." 라고 기사를 작성하면... 아마 많은 흡연자들이 "생각보다 별로 높지 않네. 그냥 피우자." 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어쩌면, 흡연의 위험성이 생각보다 작다고 생각해서 새로이 흡연을 시작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즉,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와 같은 방식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금연을 권장하기 위한 일종의 "계도"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흡연은 나쁜 것이고 금연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언론이 정확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기면서까지 그러한 계도 행위를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보복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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