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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e가 쓴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을 드디어 다 읽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히스클리프의 처절하고 비극적인 사랑과 복수는, 제목 그대로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 방식은 매우 유머러스하다는 점이다. 이는 작중 “명목상의 화자”인 록우드와 “실질적인 화자”인 엘렌 딘의 말투 때문인데, 상당히 이질적이고 역설적인 느낌을 준다.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

워낙 유명하고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이기 때문에, 굳이 뛰어난 점을 논하기 보다는 아쉬웠던 점을 위주로 얘기해보고 싶다.

먼저, 전반적인 내용 전개 중 가장 허술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가출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경위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힌들리 언쇼가 히스클리프에게 대저택과 모든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도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 규모의 담보를 제공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매우 큰 돈을 빌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히스클리프가 그런 엄청난 재산을 어떻게 모았을까? 우리 현실을 생각해보면, 든든한 배경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고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초 영국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폭풍의 언덕>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내에서 큰 의미가 없는 내용이라면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생략할 수 있다. 문제는, 히스클리프의 재산은 이후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이처럼 중요하다면, 당연히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개츠비의 막대한 재산은 소설 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지만, 그가 빈손으로 시작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된 경위가 너무 단순하게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로, 히스클리프가 선택한 증오의 대상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자신을 학대한 힌들리 언쇼나 연적이었던 에드거 린턴을 증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벨라 린턴 (에드거 린턴의 동생이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다), 캐서린 린턴 (에드거 린턴의 딸이지만,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캐서린 언쇼의 딸이기도 하다), 린턴 히스클리프 (린턴가의 핏줄이지만, 자기 친아들이다!) 까지 증오하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린턴 히스클리프는 친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미워했고,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치료조차 해주지 않고 방치했다.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소설의 “시점”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굳이 나누자면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1인칭 관찰자”에 해당하는 록우드가 실질적인 화자가 아니라, 엘렌 딘이라는 또 다른 인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형식이다. (심지어는 엘렌 딘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록우드가 전해 듣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즉, 소설 속의 모든 중요한 사건이 벌어질 때 엘렌 딘(또는 엘렌 딘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또 다른 인물)이 항상 그 자리에 함께 동석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엘렌 딘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등장인물들이 거리낌 없이 매우 은밀하고 개인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장면이 다수 존재한다. (엘렌 딘이 그러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록우드에게 설명해줄 수 도 없고, 그러면 소설 자체가 진행되지 못할 테니까...) 소설이 꼭 현실적인 필요는 없으나, 그러한 점을 감안해도 너무 부자연스럽다. 작중 실질적인 화자인 엘렌 딘은 사실상 소설 내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1인칭이지만 소설 내용은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소설을 썼다면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방식을 사용했을까?

마지막으로, 문제점이라기 보다는,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나중에 이해하게 된 부분을 한가지 언급하고 싶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 속의 중요 등장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요절한다. 프랜시스 언쇼, 캐서린 언쇼, 힌들리 언쇼, 이사벨라 린턴, 에드거 린턴, 린턴 히스클리프... 그리고 주인공인 히스클리프 자신까지! 모두 제 명을 채우지 못한다. 당연히 등장인물이 죽을 수도 있는 거지만, 좀 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의 삶에 대해 읽어보고 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에밀리 브론테의 실제 삶에 너무 많은 죽음이 있었다. 1818년에 태어난 에밀리 브론테는, 1821년 어머니의 죽음, 1825년 두 언니의 죽음, 1842년 어머니를 대신에 가족을 돌보던 이모의 죽음, 1848년 오빠의 죽음을 경험했다. 본인 자신도 1848년에 죽었고, (본인이 볼 수는 없었겠지만) 여동생 또한 1849년에 죽었다. 이처럼 많은 죽음을 경험했으니, 소설 역시 그러한 삶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소설은 정말 뛰어난 소설이다. 격정적이고 흥미진진한 내용 속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은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다. 아쉬운 점을 위주로 얘기한 것은 워낙 장점이 많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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